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란.
맨해튼 프로젝트는 맨해튼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비밀 군사 계획이며 미국이 2차 대전 당시 주도한 핵무기 개발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극비로 진행되었으며 계획이 성공하면서 미국은 세계 최초로 핵분열 반응을 이용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역사.
193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핵무기의 개발 가능성과 독일이 먼저 이를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보고하고 핵무기 개발을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비밀 서신을 작성하여 아인슈타인에게 그 서신에 서명하도록 설득였습니다. 이 아인슈타인의 서명이 있는 제안서는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되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우라늄 광석을 비축하고 엔리코 페르미와 다른 과학자들이 핵 연쇄 반응 연구에 박차를 가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루즈벨트는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에 근무하던 라이먼 제임스 브리그에게 S-1 우라늄 위원회를 이끌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강제 핵분열은 이론상 존재하며 현실에 적용 된 적이 없는 개념상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불가능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이론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해롤드 애그뉴 등 저명항 학자들이 참가하였으며 5년간 13만 명의 연구원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정작 아인슈타인 본인은 핵무기 반해 입장을 표명하여 계획에 동참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라늄의 유통을 중단하면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하였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이 작전을 허가했고 이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이 프로젝트를 가속시켜 최대한 빠르게 핵폭탄 개발을 완료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독일의 나치로부터 보호'라는 프레임으로 예산의 제한이 없는 거대 프로젝트가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에서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트리니티라는 프로젝트명으로 시행되었고 가젯(gadget)이라는 이름의 시험용 핵폭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결과물
프로젝트의 결과로 두 종류의 핵폭탄이 개발되었습니다. 우라늄-235를 탄두로 사용한 포신형 핵분열 폭탄으로 자연 우라늄의 0.7%를 차지하는 우라늄-235를 농축하여 탄두로 제작한 것입니다.
우라늄-235는 동위 원소인 우라늄-238과 원자량이 거의 동일하기에 둘을 분리하여 농축하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핵탄두의 제조 공정은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공정과 동위 원소 캘루트론 분리 공정 그리고 기체확산법과 열영동을 이용한 우라늄-235의 농축 공정이 있습니다. 이 공정들은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포신형 핵폭탄은 ‘리틀보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습니다. 리틀보이에 장착된 농축우라늄은 50%에서 89%의 우라늄-235로 구성되어 있었고 우라늄-235의 평균 농도는 85%였습니다. 리틀보이는 별도의 실험이 없더라도 정확히 작동하리라고 예견하였기 때문에 별도의 실험은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종류의 핵폭탄은 플루토늄을 탄두로 사용한 것입니다. 플루토늄은 워싱턴주 핸포드 사이트에 있는 반응로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우라늄-238에 중성자를 조사하는 핵 전환 방법으로 플로토늄을 생성하였습니다. 핵 전환으로 생성된 플루토늄은 화학적 분리 방법으로 농축되었다. 플로토늄 핵폭탄의 개발 및 제작은 뉴멕시코주에 있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에서 진행되었으며 포신형 보다 복잡한 내폭형으로 설계되었습니다.
내폭형 핵폭탄의 이름은 ‘팻 맨’이었습니다. 내폭형 폭탄은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핵분열 물질이 실제 폭발을 일으키는 지를 실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에 작전명 트리니티를 시행하여 내폭형 시험폭탄 가젯을 폭파시키게 되었습니다. 이 실험의 결과로 20 킬로톤의 TNT와 맞먹는 수준의 폭발이 일어나 직경 76m의 크레이터를 만들었고 충격파는 반경 160Km에 이르렀습니다. 크레이터 안쪽에 고열로 지표가 유리질로 변형된 부분을 트리니타이트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핵분열을 이용한 폭탄 제조에 대한 이론적 기반이 완성될 무렵, 버클리의 물리학자들은 핵융합을 통해 중수소를 삼중수소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을 "슈퍼 원자 폭탄"이라고 불렀는데 이 이론은 전후 수소 폭탄으로 제작되는데 이론 기반화 되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8월 9일에는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습니다.
일본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의 전력과 경제 제재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진출을 통한 미국 본토 타격 계획에 혼신의 힘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2발의 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였습니다.
맨해튼 계획의 연구진 중 존 폰 노이만,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등은 원폭투하에 대해 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한 일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핵무기로 인한 조기 항복이 없는 상태, 핵무기의 존재 자체가 아예 없는 상태였다면 원폭 투하나 항복 없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몰락 작전이 실행되었을 것이고 자연히 전쟁이 길어져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전쟁범죄와 학살을 계속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몰락작전이 시행되면 핵무기가 없더라도 일본인도 더 많은 수가 죽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맨해튼 계획 완수 이후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으로 전후를 처리할 생각 이였으나 장기간광대역에 걸친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이 스파이에 의해 소련으로 넘어가면서 소련이 단 4년 만에 핵무기를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소련도 핵무기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에 2차 대전 동안 이론 연구는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핵분열에 대한 과학자들의 논문과 기사가 사라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소련이 미국이 핵분열로 무엇인가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채고 결국 맨해튼 계획에 간첩을 투입하여 미국의 연구개발 자료를 빼돌렸습니다. 여기에 소련이 연구하던 내용을 더하여 핵무기를 만들어 1949년 8월, 첫 원폭 실험에 성공하였습니다.
마치며.
미국이 핵무기로 무장한 이후 소련이 핵무장하였고 이후 영국이 자체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며 이어 프랑스와 중국이 핵무장을 하였습니다. 핵무기가 비약적으로 확산되자 핵확산 금지 조약(NPT)을 만들어 핵무기 보유를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핵무기는 곧 국가의 힘으로 자리매김되어 이스라엘, 이란, 인도, 파키스탄, 북한등 핵무기 보유국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초대 핵무기 보유국이 UN 상임이사국인걸 보았을 때 핵무기 보유 만으로도 주변국가 단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전후 핵무기 개발을 이어나가는 미국 정부에 "핵폭탄의 개발은 인류에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자신의 과학적 증명을 정부가 무기로 발전시킨 것에 대한 우려와 실망과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비슷한 예로 '니트로글리세린'으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었던 노벨도 자신의 발명이 전쟁에 쓰이자 절망했다고 합니다.
파괴는 인간의 본성일까요? 사회적 산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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